인류세의 한의학 <38> 기후위기와 본초의 위기 II - 김태우 한의예과 교수
김태우 한의대 교수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소장, 『몸이 기후다』 저자
LA 산불, 2024년 12월
국내에서는 비상계엄 관련 뉴스로 가려져 있었지만, 지난해 12월 내내 전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것은 단연 LA 산불이다. 차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캘리포니아 펠리세이즈(Palisedes)에서 수백 채의 주택이 전소되고 사망자도 다수 발생했다.
캘리포니아 남부의 고급 주택들이 밀집한 그 지역과 함께, LA 북동쪽의 이든(Eaton)지역, 그리고 헐리우드 언덕으로 유명한 선셋(Sunset) 지역에서도 전에 없던 화재가 발생했다. 통계에 따르면, 이번 불로 30여명이 사망하고, 주택 1200여 채가 불탔다. 산불(wildfire)이 원인이었다. 캘리포니아는 산불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캘리포니아 남부의 LA에서, 그것도 겨울에 대형 산불이 발생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LA 산불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먼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산불”이라는 용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번 화재를 보도하기 위해 국내 언론에서 사용하는 “산불”은, 와일드파이어(wildfire)라는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더 나은 번역을 찾기 힘들 정도로 한국어에는 없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산불은 산에서 발생한 화재라고 할 수 있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서 발생하는 “산불”은 그 영어 용어가 지시하고 있듯이 대부분 자연발화하는[wild] 산불이다.
한국의 경우 농한기 농지에 의도적으로 붙인 불이 전화하여 산불이 되는 경우도 있고, 등산객의 담배꽁초가 원인이 되는 등 사람에 의해 발생하는 산의 화재가 많지만, 와일드 파이어는 산불이 발생하기에 맞는 조건이 형성되어 인간 없이 불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LA가 위치한 캘리포니아는 건조한 산림 지역이 방대하게 펼쳐져 있어서 자연발화 산불이 매년 일어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거밀집 지역은 그러한 자연 산불발생 지역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산불은 산불이고, 거주지역은 거주지역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 LA 산불은 달랐다.
자연발화가 저택으로 전화하는 시대
기후위기 시대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가 더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시대이다. 인간과 자연을 떨어뜨려, 학문도 발전시키고(예를 들면, 인문학과 과학의 분리 발전), 도시도 건설하고(즉, 도시와 자연의 분리),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자연이라는 언어도 자연만을 지칭하는 “순수화”된 자연이 되었지만, 인류세의 기후위기에서는 그 분리가 더이상 지속될 수 없다1). “자연” 발화한 산불이 LA의 “저택”들을 전소시킨 사진을, 인류가 근현대 문명을 통해 건설하려 했던, 자연과 인간 분리가 무너지는 시대적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안전한 지역에 지어졌을 고급주택들도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 이번 산불이 겨울철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 시사점을 가중시킨다. LA, San Diego(샌디에이고) 등의 대도시들이 위치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겨울철은 우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2024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우기의 겨울은, 캘리포니아 남쪽에서 산불이라는 언어가 사용되지 않는 계절이다. 실제 매년 일어나는 캘리포니아 자연발화 산불은 봄부터 가을 사이에 주로 발생한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달랐다. 본디 건조한 캘리포니아 기후에,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지 않았고, 거기에다 허리케인 수준의 강풍이 불어댔다. 미국의 수많은 소방관들과 소방헬기, 소방비행기까지 동원되어 진화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LA는 사회 인프라가 잘 갖춰진 선진국 미국의 대표적 도시이지만, 지속된 건조 기후와 강풍을 이길 수 있는 방화대책은 없었다. 자연과의 분리의 관점 속에서 도시의 방벽을 쌓아올렸지만,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우기인 겨울에 건조한 기후가 계속되고 강풍마저 불어오는 예외의 예외가 겹쳐서 이번 산불이 발생했지만, 이제 기후 관련해서는 예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기록경신”과 함께(지난 연재글 <인류세의 한의학> 37, “기후위기와 본초의 위기I” 참조), “예외”는 기후 논의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어(死語)에 해당한다. 기후 관련 기록이 매년 경신되고, 예외가 규칙이 되고있는 상황에서 그 말들을 더이상 사용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우리가 알던 기후의 규칙들이 깨지는 시기가 기후위기 시대이다. 시대는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는 시기를 말한다. 고려시대가 끝나고 조선시대가 되고, 봉건사회가 종식되고 근대 사회가 등장한다.
기후위기 시대는 예외로 점철된 시대다. 그동안의 규칙이 무화되고, 규칙 없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규칙이 깨지는 것이 규칙이 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는 이러한 예외의 예외로 그 시대가 특징 지워지는 시대다. 그 와중에 안전한 곳은 없다.
인간사회의 문제와 비인간자연의 문제
자연의 문제는 자연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기후위기시대에는 사어들이 양산되고, 말되던 문장들이 더이상 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난다.
산불이 진화되고 가시적으로 드러난 LA 피해지역의 폐허 사진은, 휴전 후에 피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폐허가 되어버린 가자(Gaza) 지구의 사진과 겹쳐진다. 한쪽은 자연발화 산불 이후의 장면이고, 한쪽은 인위적 전쟁 이후의 장면이다. 하지만 자연발화도 이제 순수한 자연발화는 없다. 인위의 열이 가자에서도, LA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두 경우 모두 불이 두려운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쪽은 폭격의 불바다 이후의 장면이고, 한쪽은 광풍과 함께 몰아친 산불 이후의 장면이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이미 인간의 인위적 활동이 만들어 낸 열기가 내재해 있는 산불이다.
온실가스로 대표되는, 쓰고 남은 것들에 대한 배출은 줄어들 줄 모르고, 지구는 점점 더워진다. 일정 정도의 변화의 폭을 유지하던 기후가 그 범위를 벗어나자 예외와 그 예외에 겹친 예외가 규칙이 되면서, 기후위기시대의 문제는 심화되고 있다. 자연발화와 같은 언어도 다른 용어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인위와 자연의 구분이 불분명하다.
초유의 사태라고 기록될 LA 산불은 이렇게 표현되곤 한다. “30여 명 사망, 12,000여 채 주택 전소.” 사람들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불탄 나무들, 죽은 동물들, 곤충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들 비인간존재들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있다면 산불이 태운 지역의 면적이 있다), 이들의 죽음이 안타까운 일이 아닌 것이 아니다. 존재들이 연결된 지구 위, 비인간 존재들과 인간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삼 재배지가 북상하여 강원도가 인삼을 가장 많이 재배하는 지역이라는 통계와, 머지않은 미래에 남한에서 인삼재배가 어려울 것이라는 보도는 본초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들은 여전히 인간을 중심에 둔 말들이다. 인삼은, 생육을 못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후위기를 맡고 있다. 북상하는 인삼재배지는 인삼의 입장에서는 폐허가 된 거처의 다른 표현이다. 기후 난민이 된 인삼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후위기를 맡고있는 인간의 문제는 인삼과 같은 비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살 수 있는 땅을 잃어가는 인삼의 문제는 지구비등화2) 와중의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후위기의 현상은, 비(非)존재로 존재했던 인간 아닌 존재들을 다시 본디의 위치로 되돌리고, 다시 연결된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을 지금 바로 실천하라는 경고음이라고 할 수 있다. 기후위기 속 본초의 위기는 이에 대한 의미 있는 예시를 제공한다(다음 연재글 “기후위기와 본초의 위기”III에서 계속).
1) 동아시아에서 네이처(nature) 자연을 번역하기 위해 도덕경의 자연(自然)을 차용하였지만, 그 두 자연의 뜻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본 출처인 『도덕경』 25장의 문장(“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 말하고 있듯이, 동아시아의 자연은 인간도 법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전 연재글 <인류세의 한의학> 8, “자연과 자연” 참조.
2) 지구비등화는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걷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2023년에 언급한 global boiling의 번역어이다.
김태우 교수
news@akom.org
기사원문
202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