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 김호철 한의예과 교수
임상의가 다시 읽는 한약 성분의 약동학‘얼마나’보다 ‘어떻게’를 묻다
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약을 다루는 현장에는 늘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공존한다. 하나는 전통의 경험과 직관이 쌓아 올린 복합 처방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혈중 농도나 약물동태 곡선 같은 근대 약리학의 언어다. 환자의 몸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려면 두 언어를 모두 알아두면 좋다.
그럴 때 흔히 제기되는 첫 질문이 “이 성분, 몸으로 얼마나 들어가느냐”이다. 그러나 한약 성분은 혈중 AUC(Area Under the Curve) 하나로는 전모를 보여 주지 않는다. 일부는 혈관으로 곧장 들어가서 전신 농도를 확보해야 효과를 내지만, 더 많은 성분은 장내 미생물이나 간 대사라는 우회로를 거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작용하거나, 아예 흡수되지 않은 채 장관 내에서 역할을 다 한다. 숫자를 넘어선 총체적 시야가 필요한 이유다.
다섯 겹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복합 약물
탕제를 복용하면 첫 관문은 위·소장에서의 가수분해다. 다당·배당체가 잘게 쪼개지고, 지용성 성분은 단순 확산으로, 수용성 배당체는 운반체 단백질의 도움으로 장벽을 넘는다. 두 번째 관문은 장 상피 자체와 간에서 벌어지는 1차 대사다. 시토크롬 P450, UGT, SULT 계열 효소가 성분의 분자 구조를 바꾸어 놓는다.
세 번째 관문은 장내 미생물이다. 흡수되지 못한 고분자 배당체는 β‑글루코시다아제에 의해 소수성 아글리콘으로 변환돼야 비로소 장벽 투과성이 생긴다. 네 번째 관문은 재흡수다. 변환된 대사체가 장벽을 다시 넘어야 전신 순환계에 입성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야 면역·대사 조절 신호가 혈중과 조직으로 퍼져 나간다. 이러한 다층적 루트 때문에 단일 수치로 흡수를 재단하는 시도는 언제나 어딘가를 놓치기 쉽다.
혈중 농도를 확실히 확보해야 하는 대표 성분
갈근(葛根)의 푸에라린은 가장 많이 연구된 한약 플라보노이드다. 경구 생체이용률은 랫드 모델에서 약 7 %로 보고된다. 낮은 수치이지만 해당 연구에서 정맥 투여 시와 비교했을 때 조직 분포는 관상동맥, 뇌혈관까지 두루 퍼졌고, 반감기가 4~6 시간으로 길어 반복 투여 시 농도 누적이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갈근은 이렇게 생체이용율이 낮아 전통적으로 한 번에 비교적 많은 양을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고삼(苦參)의 알칼로이드인 마트린은 2 mg/kg 경구 투여 후 C_max 92 ng/mL, 절대 생체이용률 17 %로 보고됐으며 반감기가 3 시간가량이라 1일 3회 복용 설계로 전신 항바이러스·항섬유화 효과를 목표로 한다. 카페인은 더 극단적 예다. 45 분 이내에 99 %가 흡수되고 혈중 최고 농도에 도달한다. 이런 고흡수·고반감기 성분은 의도한 전신 작용을 얻는 데 유리하지만, 동시에 약물 상호작용과 C_max 급등 리스크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장내 미생물 변환물이 주인공”인 성분
대황(大黃)의 센노사이드는 직접 흡수율이 사실상 0 %다. 대신 대장에서 특정 장내 미생물이 이를 ‘레인 안트론’이라는 활성형으로 전환해야 비로소 효과를 나타낸다. 이 과정은 주로 비피도박테리움 같은 유익균의 β‑글루코시다아제와 환원효소에 의해 이뤄진다.
따라서 장내 미생물 상태에 따라 동일한 용량의 센노사이드라도 반응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때 활성물질인 레인 안트론은 장 점막에 국소 자극을 주어 연동운동을 촉진하고, 일부는 혈류로 들어가 COX 억제를 통해 염증성 장 질환의 통증도 완화한다.
그래서 대장내시경 전 항생제나 장 세정제를 사용한 환자는 센노사이드 반응성이 저하될 수 있다. 만일 대황계 약물이 듣지 않는 만성 변비 환자의 경우, 유익균 보충이나 프리바이오틱스 병용을 통해 반응성을 회복할 수 있다.
비슷한 패턴은 황금(黃芩)의 바이칼린에서도 보인다. 경구 생체이용률이 2~4 % 수준이나 탈배당 후 형성되는 바이칼레인·바이칼레인‑7‑O‑글루쿠로니드가 NF‑κB 하위 신호를 억제해 강력한 항염 작용을 발휘한다. 게다가 이 대사체는 뇌혈관 장벽 투과성이 높아 신경 염증 질환 연구에서 주목받는다. 한약 성분과 장내 미생물의 ‘공동 제작’ 모델이 어떻게 전신 작용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다.
‘흡수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성분
반대로, 흡수가 되지 않아 작용을 완성하는 성분도 있다. 망초(芒硝)는 황산나트륨 10수화물로, 경구 투여 시 장 점막으로 거의 흡수되지 않는다. 오히려 흡수되지 않는 덕분에 장 내강에 고삼투 환경을 만들어 수분을 끌어들여 변을 연하게 하고 장관 압력을 높인다.
연구에 따르면 설파트 이온은 장 융모를 쉽게 통과하지 못해 지속적인 삼투층을 형성해 준다. 같은 계열로는 마그네슘 설페이트, PEG, 락툴로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비흡수성 이온·분자’라는 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배변 촉진, 장 세정, 간성 뇌병증(암모니아 포집)까지 임상 범위를 넓힌다.
흡수율을 바꿀 수 있는 제형 공학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발효·효소 처리는 배당체를 아글리콘으로 전환시켜 장벽 투과성을 높인다. 둘째, 지질 나노입자나 고형 지질 캐리어는 소수성 성분을 림프 경로로 우회시켜 1차 간 대사를 피한다.
셋째, 피페린 같은 bio‑enhancer를 병용하면 약물 대사 효소나 P‑gp를 억제해 동반 투여 물질의 C_max를 2~5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다만 와파린, 페니토인 등 협소한 치료역을 가진 약물과 동시 복용할 때는 INR·혈중 농도 모니터링이 필수다. 넷째, 염변경이나 프로드러그 설계로 용해도, 지질 친화도를 조절하는 기법이 있다. 베르베린의 경우 기반 염을 유산염에서 호박산염으로 바꾸었을 때 C_max가 2배 이상 상승했다는 보고가 있다
임상의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검 리스트
첫째, 내가 기대하는 효능의 주성분이 원형 분자인가, 아니면 장내·간내에서 재탄생한 대사체인가. 둘째, 제형이나 병용 약물이 흡수율을 의도치 않게 끌어올려 독성 리스크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셋째, 환자들에게 설명할 때 ‘낮은 흡수율=효능 부족’이라는 오해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소할 것인가. 예를 들어 “센노사이드는 흡수가 안되니 효과가 없다.”라는 걱정은 “몸이 아니라 장내 미생물이 약을 완성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약 성분이 체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일정 농도의 혈중 도달이 필요하다는 전통 약리학의 명제는 절반만 맞다. 어떤 성분은 낮은 흡수율이라도 장내 미생물 변환물이나 국소 장점막 작용으로 강력한 임상 효과를 만든다.
반면, 고흡수 성분은 전신 독성·약물 상호작용 리스크라는 짐을 함께 짊어진다. 결국 임상의가 설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흡수율 올리기’가 아니라, 작용 위치·대사 형태·환자 안전성을 모두 묶어 내는 통전적 약력학 전략이다. 복합성을 과학으로 번역할 때, 한약은 전통과 현대가 손을 맞잡고도 여전히 설득력을 잃지 않는 치료 옵션으로 남을 수 있다.
기사원문
2025.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