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❽ - 김호철 한의예과 교수
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 후배 한의사가 내게 물었다. “세포나 동물실험에서 약리작용이 확인되면,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단순한 질문 같지만,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마주하는 한의사라면 누구나 고민해 봤을 문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예스도, 노도 아니다.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보장이 아니지만,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어떤 약리작용은 임상에서 상당히 높은 개연성으로 재현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실험실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결국 임상의가 약리학적 원리, 성분의 특성, 체내 대사 과정, 그리고 동물모델의 속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임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효과를 추측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특히 아직 임상시험이 풍부하지 않은 한약 분야에서 이러한 지식은 과학적 한의학을 실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다.
세포실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단계
세포실험은 약리연구의 가장 앞단에 놓여 있다. 특정 성분을 세포에 처리했을 때 염증 매개물질이 줄거나 산화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결과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곧 임상효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농도의 벽이다. 세포실험에서 사용되는 농도는 인체 내에서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플라보노이드, 사포닌과 같은 성분은 위장관 흡수율이 낮고 간에서 빠르게 대사되기 때문에, 시험관 속 세포에 적용된 수준의 농도를 환자에게서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세포는 단순한 환경에서 특정 반응만을 보여줄 뿐, 면역·내분비·신경계가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인체의 생리학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한다. 세포에서 항산화 효과가 뚜렷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노화 억제나 만성질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임상시험에서 증명됐다. 따라서 세포실험은 기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신호일 수는 있으나, 임상효과를 보장하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동물실험, 모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세포실험보다 임상과 한 걸음 더 가까운 것은 동물실험이다. 그러나 동물실험 역시 결과 자체보다 어떤 모델을 사용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모델의 타당성이 곧 임상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혈압 연구다. SHR(Spontaneously Hypertensive Rat)은 자연적으로 혈압이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며, 병태가 사람의 본태성 고혈압과 매우 유사하다. 이 모델에서 혈압 강하 효과를 보인 약물은 실제 임상에서도 효과를 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수많은 항고혈압제가 SHR 모델을 거쳐 개발됐다.
반대로 치매 연구는 상황이 다르다.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은 아밀로이드 단백의 축적은 재현할 수 있으나, 사람의 인지 저하와 같은 복잡한 병태는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실험에서 수없이 성공한 후보 물질들이 임상시험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중풍 연구에서 쓰이는 중대뇌동맥폐쇄(MCAO) 모델도 마찬가지다. 혈관을 기계적으로 막아 뇌경색을 유발하는 방식은 일정 부분 사람의 뇌졸중을 재현하지만, 손상을 지나치게 균일하고 과격하게 일으킨다. 동물에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임상에서는 기대보다 훨씬 적게 재현될 수 있다.
대사질환 연구에서는 고지방식이를 먹인 쥐 모델이 흔히 쓰인다. 이 모델은 쉽게 비만해지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지만, 사람의 당뇨병처럼 유전적 요인, 환경, 생활습관이 얽힌 복합적인 병태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종양 연구에서 널리 쓰이는 이식종양 모델도 비슷하다. 암세포를 동물에 주입해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방식은, 수년에 걸쳐 면역과 미세환경이 변하며 발전하는 사람의 암을 충실히 재현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에서 효과가 있어도 항암제의 임상 성공률은 극히 낮다.
결국 동물실험은 “효과가 있었는가”보다 “이 모델이 사람의 질환을 얼마나 닮았는가”를 따져야 의미가 있다. 임상의가 동물실험 결과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약동학, 임상효과의 문턱
좋은 모델에서 효과가 확인되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약물이 체내에서 흡수되고, 간에서 대사되며, 혈액 속에서 일정 농도로 유지되는 전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에서는 혈중 농도가 잘 유지되지만, 사람에서는 간 대사가 지나치게 빨라 효과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대사를 거쳐 오히려 더 강력한 활성 대사체로 전환되기도 한다. 약동학적 차이는 약리작용의 임상 전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특히 한약재 성분은 함량이 낮고 흡수율도 제한적이어서, 세포와 동물에서 관찰된 효과가 임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위점막에 직접 작용하는 성분은 혈중 농도가 낮더라도 국소적으로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작약이나 선복화 추출물이 위염 모델에서 소량으로도 효과를 보이는 것이 좋은 예다. 따라서 임상가는 약리작용을 해석할 때 반드시 이 약물이 전신 농도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국소 작용만으로 충분한지를 구별해야 한다.
한약 연구의 특수성
양약은 대개 단일 성분 기반으로 개발된다. 따라서 성분별 약리작용과 임상효과를 비교적 일대일로 연결할 수 있다. 반면 한약은 수십 가지 성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제제다. 이 때문에 단일 성분 연구로 전체 제제의 효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분 간 상호작용, 추출 조건, 제형 특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플라보노이드가 세포에서 항염 작용을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 탕약에서는 다른 성분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단일 성분의 함량이 극히 낮아 실험실에서 본 효과가 임상에서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임상가는 더욱 성분의 약리작용과 체내 대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형 전체의 작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한약의 과학적 근거는 단일 성분 연구에 국한되지 않고, 제형과 임상 경험이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난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확증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임상시험이 부족한 한약 분야에서도 임상효과를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혈압처럼 충실한 모델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고, 치매나 종양처럼 모델이 취약한 영역에서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위점막 보호처럼 국소 작용이 가능한 경우는 낮은 용량으로도 임상적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임상의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이 각각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는지, 약물이 체내에서 어떤 흡수·대사 과정을 거치는지, 그리고 한약이라는 복합제제가 단일 성분 연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임상의는 단순히 연구 데이터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험실의 결과를 환자의 몸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그 개연성을 바탕으로 임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과학적 근거와 임상 경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읽어내는 눈이 바로 임상의의 무기다.
과학적 한의학은 지식의 소비가 아니라, 해석과 성찰 위에 선다.
기사 원문
2025.09.30